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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그 아름다운 색을 자랑하는 고려청자(高麗靑瓷)는 비록 각 나라 민족마다 예술적인 감각과 정서의 차이점이 있을지는 모르나, 동·서양인 모두의 사랑을 받아 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예술품입니다.
저는 청자가 지니고 있는 지극한 아름다움과 그것이 세계를 향해 펼쳐나갈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확신 하나로 40이 넘은 나이에 도예의 길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저의 호인 혁산(赫山)은 60년대 초반 제가 청자를 만들기 전 어느 분이 지어준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 운명을 예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희 동국요가 자리한 곳은 이천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수하리(水下里)라는 곳입니다. 물 아래 마을이란 의미일 수도 있겠고, 땅 밑에 물이 많은 마을, 아무리 여름철에 장마가 져도 해(害)가 없는, 한마디로 물이 이로운 이천(利川)에서도 물과 더불어 사는 마을입니다.
생명수인 물은 불과 더불어 흙과 어우러져 불의 예술인 도자기를 탄생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곳에 우리나라의 옛 이름을 뜻하는
동국(東國)을 의미하는 [동국요(東國窯)] 라는 가마에 첫 불을 지피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1년의 일입니다.

지금은 도로가 포장되어 대형버스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이지만, 초창기에는 기다란 장화를 신고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 길이었습니다.
열악한 상황에도 한국 최고의 명요(名窯)를 만들고픈 생각 하나로 청자에 관한 전문 서적을 읽고 또 읽고 청자의 고향인 전남 강진군을 수십 차례 오가면서 원료(原料)와 도편 수집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고려 청자의 재창조를 위해서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 원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이러한 고지식한 노력을 이해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당시 국립박물관장인 故 최순우 선생은 저의 작품이 12세기 고려 청자의 색상과 형태에 가장 근접해 있다면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삼성그룹 故 이병철 회장의 적극적인 배려로 현 서울 충무로의 신세계 백화점에서는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국요의 초석이 되어주셨던 故 고영재씨, 故 주기헌씨, 故 선용근군(君)의 명복을 빕니다.
한편 초창기부터 언제나 격려해주신 최순섭 형님의 은혜, 어려운 시기마다 조용히 도와준 영원한 지기(知己)인 가토
마사이(加藤正猪)씨, 그리고 언제나 저의 청자를 지극한 사랑으로 아껴주시는 동국요의 애호회 회장이신 나카야마
에이이치(中山瑛一)부부를 비롯하여 바바나오토(馬場直人)회장, 이외에도 저와 동국요를 아껴주신 수많은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수 년간의 실험과 고초 끝에 1975년 강진군 대구면 계율리에서 고려시대의 것과 가장 비근하다고 추정되는 태토(胎土)를 직접 발견하였을 때의 벅찬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이 기뻤던 순간이라 기억됩니다. 저희 동국요로서는 지난 날 회한과 영광의 시간 중 최고의 행운으로, 꿈에서만 그리던 점토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확보하였을 때의 저의 흥분된 심정은 마치 옛 청자를 온전히 찾아낸 것처럼, 그날 밤은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가족처럼 지내왔던 직원이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적도 있었고, 도자기 상인들과의 우여곡절 또한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동국요의 작품들이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연들이라 생각하며 그들과의 기억 역시 좋은 추억으로 새기려 합니다.

「비록 마음 속으로는 원할지언정 그것을 바라거나 기대하지는 말라」는 좌우명으로 저의 혼신을 다해 살아온 지금, 영리(營利)와는 거리가 먼 탓에 시설면에서는 초창기 모습 그대로이지만 작품에 있어서만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제 나이 여든에 접어들어 어느 새 한국의 도예인 중에서 최고의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선조의 얼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비색청자의 재현에 저의 남은 여생동안 진력하는
길이 저를 아껴주시는 여러분께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앞으로도 끊임없는 고견과 질책의 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